
이 글은 부산게슈탈트심리치료센터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혹시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약속 장소에 가면서 갑자기 목적지가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매일 타는 차 번호가 순간 떠오르지 않는 경험.
중요한 대화 중에 갑자기 멍해지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충동.
이런 순간마다 스스로를 탓하신 적 있으신가요.
"왜 이러지. 나 요즘 너무 피곤한가. 집중력이 떨어진 건가."
오늘 아침, 저도 그랬습니다.
병원 프론트에서 직원분이 환하게 웃으며 물으셨습니다.
"차량 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매일 타고 다니는 차인데,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황급히 휴대폰 사진첩을 뒤졌지만 며칠 전 정리를 했던 터라 결국 번호를 말씀드리지 못한 채,
얼굴만 빨개져서 병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걸으면서 문득,
며칠 전 상담실에서 들었던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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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에서 들은 이야기
부부상담으로 방문하시는 아내분이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잊으려고 해요.
남편과 싸운 기억들을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아요.
그래야 마음이 편해져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덧붙였습니다.
"감정이 올라오면 생각으로 전환하려고 애썼어요.
그랬더니 감정의 동요가 많이 줄었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붙들렸습니다.
조금 후 그녀는 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편의 감정은 무시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대화 중에 관심 없는 주제가 나오거나 말이 느리면
자연스럽게 폰을 집어드는 저를 이해할 수 없어요."
저는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셨던 걸까요?"
잊는 것이 때로는 생존이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자신을 탓합니다.
집중력이 없다고,
의지가 부족하다고,
상대에게 무관심한 거라고.
그러나 심리치료 현장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다른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감정을 끊어내는 것,
잊으려 하는 것,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
멍해지는 것 ,
이것들은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해리(dissociation)
혹은 회피적 대처(avoidant coping)라고 부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 앞에서 마음이 자동으로 거리를 두는 방식입니다.
게슈탈트 치료에서는 이것을 창의적 적응(creative adjustment)이라고 부릅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환경 속에서,
그 사람이 찾아낸 최선의 생존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에도 비슷한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집 안의 공기는 언제나 긴장으로 가득했고,
아버지의 발소리만 들어도 몸이 얼어붙던 시간들.
누나는 책 속으로 숨었고,
또 다른 누나는 친구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만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거나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야 무서움을 조금 덜 느낄 수 있었고,
슬픔을 잠시 잊을 수 있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려 했던 걸까?"
이 질문 앞에 서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부드러워집니다.
자책이 아니라 이해가 시작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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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문제는,
그 생존 방식이 지금의 관계 안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몸은 여전히 오래된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소중한 사람의 말 앞에서 멍해지고,
중요한 순간에 기억이 흐려지고,
감정이 올라오면 자동으로 폰을 집어듭니다.
이것이 반복될 때,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상대는 무관심하다고 느끼고,
나는 왜 이러는지 모르면서 자책합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의지를 다잡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 패턴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멍해지는 순간이 언제인지.
어떤 감정이 올라올 때 자동으로 도망가려 하는지.
그 순간 내 몸은 어떤 신호를 보내는지.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변화의 첫 번째 자리입니다.
게슈탈트 치료에서 알아차림(awareness)은 단순한 인식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고 접촉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이 충분해질 때,
오래된 패턴은 비로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오래 버텨온 마음에게
우리 안에는 저마다 하나씩의 안전한 공간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침묵 속으로,
누군가는 생각 속으로,
누군가는 바쁜 일상 속으로,
누군가는 휴대폰 속으로 숨습니다.
그 공간은 때로 세상과 우리를 멀어지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무너져버리지 않게 붙잡아준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자꾸 잊는 나를,
멍해지는 나를,
감정을 바로 느끼지 못하는 나를,
오늘은 조금 다르게 바라봐 주세요.
어쩌면 그 마음도,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애쓰고 있었던 것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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